05 비텐베르크(Wittenberg)

https://www.luther2017.de/en/

몇년 전 독일 루터교회에서 영성훈련을 책임 맡고 있는 마티아스 박사님(Matthias Rost)과 그의 프로그램에 함께 참여한 루터교회 목사님들 몇분이 한국에 방문했었다. 

소위 한국의 '메가처치'를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한국교회의 상황과 다양한 노력들을 보여주기 위해서 서울 뿐만 아니라 지방에까지 매일 강행군을 하면 사람들을 만나고 인터뷰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이제는 그분들이 한국 목회자들을 초청하여 독일 현지교회의 상황과 모습을 보여주고자 초청하셨다.

우리와 함께 전 일정을 해주셨던 마북의 신학교에서 가르치시는 김나함(Nahamm KIM) 박사님과 독일의 일정을 함께 해준 마티아스 박사님이 아니었다면 독일 현지교회와 깊게 교제할 수 있는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마틴 루터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불의한 교황의 권력에 대항하며 교회 문에 붙인 95개조 반박문의 이야기일 것이다. 실제로 반박문이 붙었을 것이라 추정되던 비텐베르크 성 교회의 원래의 문은 불에 타서 없어졌고 대신에 이렇게 반박문의 내용을 담은 새로운 문이 생겨났다. 1517년 10월31일에 붙은 95개조의 반박문이 실제로 이 때 한번의 사건으로 개혁이 시작되었다기 보다는 토론을 위한 95개의 명제문을 붙임으로써 그 당시 부정의 했던 로마 카톨릭의 교리와 교황에 대한 개혁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비텐베르크 시립교회는 첫 독일어 예배가 드려진 곳이며, 빵과 포도주를 성도에게 처음으로 나누어준 역사적인 장소이다. 이곳에서 사역하시는 담임목사님 Johannes Block 박사님과 사모님의 설명을 듣고 함께 토론하고 교제하는 시간을 가졌다. 루터의 행적에 대해 일종의 홍보역할?을 맡은 당대 유명한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와 그의 아들의 작품들이 비텐베르크 전역에서 만날 수 있다. 





시립교회의 외벽 한쪽 구석에는 랍비가 돼지 뒤에서 밑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고 밑에서 돼지 젖을 빠는 유대인들의 조롱이 담긴 벽화가 그대로 남아있다. 루터 자신도 마찬가지였고 개혁교도들 대부분은 유대인에 대한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그리고 이러한 anti-semitism은 1,2차 세계대전을 통해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한가지 흥이로운 사실은 독일교회가 저런 조각상을 없애지 않고 그들의 하나의 역사로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아래 바닥에는 마치 억압하고 억합하지만 그럼에도 그 억압을 뚫고 나오려는 유대인의 민족성을 대변하는 부조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이들을 위로하고 또 교회로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백향목 한그루를 교회 앞에 심어놓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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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프라하 얀 후스의 발자취를 따라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인 1372년 크로미예지즈 밀리츠는 프라하의 매춘녀들을 수용하는 '예루살렘'이라는 사회복지 시설을 설립한다. 

그 당시 이 지역의 여인들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죄에 대한 고해성사를 들으면서 궁극적인 삶의 변화가 이들에게 필요함을 느끼고 밀리츠는 매춘녀들을 위한

사역에 뛰어 들게 된다. 종교개혁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소외된 자들의 영혼에 관심을 갖는것에서 시작된다. 


교구교회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베들레헴 채플은 체코 개혁의 진원지가 될 수 있었다. 후스는 지속적으로 이곳에서 설교와 교육을 통해 종교개혁의 사상을 가르쳤다. 후스의 순교 이후에도 야꼬우벡이나 다른 사제들에 의해 후스의 개혁사상은 계속해서 이어져 나갔고 이웃교회 벽속의 마르틴 교회에서도 이종성찬의 성만찬이 시행되었다.


까렐대학의 깔로리눔, 얀 후스가 대학학장으로 있으면서 종교개혁의 불씨를 당겼던 곳이다.



*참고문헌: 이지 오떼르, 김진아 역, "걸어서 가보는 프라하 종교개혁이야기"(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12), 2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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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얀후스박물관(Centrum Mistra Jana Husa), 유배지(Kozí Hrádek) 그리고 타보르(Tabor) 박물관



얀 후스 박물관




얀 후스가 살던 당시 독일의 유명론이 유행하던 시절 얀 후스는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게 되고 그의 사상을 가르치게 된다. 1412년 십자권 원정을 위한 면죄부를 강도 높게 비판하다가 1413년 파문을 당하게 된다. 이후 얀 후스의 이곳 코지 흐라덱이라는 귀족의 성에 은거하면서 "교회론"을 저작한 곳이다. 이후 1414년 그는 프라하에 돌아가 개혁의 불씨를 지펴갔다.



체코 형제단의 타보르파의 역사가 살아숨쉬는 곳

1415년 얀후스가 화형을 당한 이후에도 로마 카톨릭에 대한 저항은 계속되었고 그중 타보르는 민족항쟁이나 종교개혁의 최후의 보루로 남게 된다. 로마 카톨릭 진영은 십자군을 앞세워 지속적으로 공격하지만 '안 쟈슈카' 장군이 이끄는 군대에 번번히 패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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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텔츠(Telč) 그리고 관용의 교회


체코에서 1993년부터 선교사로 사역하신 이종실 선교사님이 텔츠(Telč)지역에서 최근에 시작한 사무실 전경


텔츠(Telč)지역을 맡아 사역하시는 현지 목사님과 함께



텔츠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관용의 교회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비슷한 양식의 두 교회가 작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교회가 세워져 있다.

현재는 들어가는 입구를 새롭게 만들어서 그렇지 원래 지어졌을 당시에는 길가에서 출입문이 보이지 않도록 만들어졌다고 한다. 


체코의 종교개혁은 30년 전쟁(1618-1648) 이후로 거의 완전히 탄압이 되었다. 로마 카톨릭과 합스부르크 황제에 대항한 체코 혁명은 무참하게 끝나게 되고 27명의 민족지도자들은 1621년 6월21일 재판을 받고 프라하 구시가지에서 처형을 당하여 그 시신들이 광장에 걸리게 된다. 이후 코멘스키를 포함한 3만 여명의 개혁교도들이 추방을 당하게 된다. 이러한 영향으로 이후에 1722년 독일 작센 지역에 정착한 한 그룹이 바로 헤른후트이다. 160여년 가까이 지속된 반종교개혁은 1781년 요셉2세 황제가 합스부르크 군주국 지역의 비카톨릭교도들에게도 종교의 관용을 허락하는 칙령을 내린다. 


바로 이때 루터나 스위스의 종교개혁을 따르던 개혁교도들이 교회를 세운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물론 여전히 카톨릭 국가 내에서의 다양한 차별은 존재 하였으나 그 속에서 나름의 터전을 마련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의 성경 대부분에는 이종성찬을 의미하는 잔이 표지 앞에 새겨져 있다. 



*참고문헌: 토마시 부타, 이종실 역, "체코 종교개혁자 얀 후스를 만나다"(서울: 동연, 2015), 147-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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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크랄리체 비밀 성경 출판소(Památník Bible Kralické)



프라하에서 남동쪽으로 달리다보면 숲속의 작은 마을이 나타난다. 

관광객은 결코 잠시라도 방문하지 않을 것 같은 이 자그마한 마을에 체코의 기독교의 역사가 숨어있었다.




이곳 크랄리체 성경 출판장소를 이해하려면 체코의 기독교에 대한 전이해가 필요할 것 같다.

사실 체코는 1517년 독일에서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기 100여년 전에 얀 후스를 통하여 종교개혁을 경험했던 곳이다. 

그러나 다른 유럽에서의 종교개혁과는 달리 얀 후스는 1415년 7월 6일, 콘스탄츠에서 화형을 당한다. 그의 죽음이후 여러 추종자들이 나타나는데 크게 따보르의 급진파와 프라하의 온건파로 나뉘게 되었다.


 

프라하의 온건파가 이후에 기세를 잡고 로마와 타협하는 모습을 보고 급진적인 후스파의 운동이 15세기 후반에 나타난다. 이들을 '체코 형제단'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들은 핍박과 박해를 피해 비교적 영주의 영향력이 강하지 않은 시골 지역으로 들어가서 그들만의 신앙을 유지하고 발전시켰다. 1579-1593년에 형제단의 신앙고백과 교리, 교회 조직, 찬송가, 주석이 더해진 체코어 성경이 출판되고 이를 '크랄리체 성경'이라고 불렀다. 




형제단을 대표하는 감독이 이어졌는데 그중 마지막 인물이 바로 얀 아모스 코멘스키(1592-1670)이다. 그는 신학자이자 교육자로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참고문헌: 토마시 부타, 이종실 역, "체코 종교개혁자 얀 후스를 만나다"(서울: 동연, 2015), 128-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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