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주의운동의 평화공존 가능성 모색


황인성


Ⅰ. 서론

   20세기를 전후로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정책은 그 한계를 드러내면서 결국 1차, 2차 세계대전이라는 인류의 씻을 수 없는 큰 상처를 남기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유대인들의 핍박은 극에 달하였고 때마침 제국주의와 민족주의를 중심으로 한 ‘시온주의운동’이 태동되었고 여러 열강들 사이에서 마침내 팔레스타인 지역에 그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순수한 종교운동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정체적 세속적 정부구상에 대한 욕구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팔레스타인 내 비유대인들과의 충돌은 불가피하였다. 그리고 1세기가 지나도록 아직도 그 갈등은 쉽게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악화되어 보이는 듯 하다.[각주:1]

   팔레스타인 분쟁의 직접적 원인을 제공하는 시온주의 운동은 어떻게 발생하였고 또 그 특징은 어떠한지, 특별히 유대교 정통주의와의 비교를 통한 종교적 의미와 시온주의 운동의 차이점과 유사성을 살펴보고 미래적 제언으로 앞으로 팔레스타인 영토 분쟁에 있어서 평화를 모색할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과 시도들을 돌아보고 평가하는 것이 필요하다. 기독교의 입장에서 또한 어떠한 비판적 자세를 견지해야 하는지에 대한 연구도 필요할 것이다. 


Ⅱ. 시온주의 운동의 역사


   예수의 지상 사역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의 폭동이 일어나고 이후 로마제국이 예루살렘을 파괴하면서 2000여 년 간의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 유배생활이 지속되어 왔다. 기독교가 박해의 시기를 거쳐 로마제국의 국가 종교로 인정되면서 유대인에 대한 핍박과 차별은 점점 심화 되었고 오랜 시간 동안 유럽과 이슬람 국가들에 상처를 남겨 준 십자군 전쟁의 또 다른 희생자들은 바로 유대인들이었다. 심지어 종교개혁의 시기에도 대부분의 종교개혁가들은 유대인들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각주:2] 이러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세계 속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속한 사회에서 사회적 지위와 위치를 얻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실제로 초기 기독교 시대에는 오히려 이러한 유대교의 사회적 지위와 도덕성을 이용한 선교적 교두보를 마련하기도 했다.[각주:3] 그러나 유대인에게 있어서 자신들이 속한 국가나 사회에 완전히 동화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러한 비전을 꿈꾸던 유대계 철학자들이나 정치가들도 자신들의 꿈이 이상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20세기로 다가오면서 더욱 심해지는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와 민족주의로 집결하는 가운데 인종차별정책으로 인한 불안감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동화가 아닌 이제는 자신들의 땅으로 모이는 것에 관심이 커져가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여한 일이었을 것이다. 특별히 유대교에서 강조되는 ‘선택받은 민족’과 ‘약속의 땅’, ‘예레츠 이스라엘’(Eretz Israel) 개념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더욱 ‘시온’에 대한 갈망이 커지는 직간접적인 원인이 된 것이다. 

   1881년 러시아 황제 알렉산더 2세가 살해된 배후에 ‘유대인’이 있었다는 소문에 의해 시작된 유대인 박해는 혁명의 시기였던 192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유대인이었던 프랑스 장군 알프레드 드레퓌스는 1894년 조국 프랑스를 배신하고 독일을 도왔다는 혐의로 징역형을 받았으나 오랜 시간 후에 명예가 회복되기도 하였다.[각주:4] 그리고 20세기 최악의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는 독일의 홀러코스트 등은 유럽에 살고 있는 수많은 유대인들에게 ‘반유대주의’가 이제는 참아만 하는 시련이 아닌 당당하게 맞서거나 완벽하게 회피해야하는 대상으로 바뀐 것이다. 

   한스큉은 이러한 시온주의 태동의 배경을 설명하면서 ‘홀로코스트’가 시온주의 운동의 확산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지만 홀로코스트 자체가 시온주의 운동의 시발점으로 보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각주:5]그리고 그는 시온주의 운동은 20세기 전후로 강성해지고 있는 제국주의의 상황 속에서 일어난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운동이지 순순한 ‘시온’을 소망하는 종교적 운동과는 거리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각주:6]예후다 알카라(Yehudah Alkalai), 츠비 히르시 칼리셔(Zevi Hirsch Kalischer), 엘리에제르 벤 예후다(Elezer Ben Yehuda), 모세스 헤스(Moses Hess)와 같은 랍비와 사회 혁명가들에 의해 시온주의 운동의 발판이 마련되었고 1882년 공식적으로 첫 이스라엘 ‘이주’(알리야, Aliyah)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레온 핀스커(Leon Pinsker)에 의해 정치적 시온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각주:7]


‘올바르고 유일한 치유책은 자신의 땅과 토대 위에서 유대인 국가와 유대인 민족을 만드는 것이고 유대인이 스스로 해방되는 것이며, 자신의 고향을 얻음으로써 다른 나라와 동등한 나라가 되는 것이다’[각주:8]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은 종교적인 측면이 아닌 민족적 측면에서 유대인들이 이제는 자신들의 땅을 가져야 할 것을 강하게 주장하였고 글과 정치력에 있어서 뛰어난 그는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유대인들의 국가 설립을 위한 제1회 세계시오니스트 총회를 개최하게 된다. 


1) 유대의 농업 노동자나 공업 노동자의 손을 빌어서, 적당한 방법으로 팔레스티나를 개척한다. 2) 각국의 법에 맞는 국내, 국제 단체의 지원을 얻어, 세계의 유대주의를 통합하고 조직화 한다. 3) 유대의 민족의식과 민족감정을 강화하고 유지한다. 4) 시오니즘의 목표 달성에 필요한 정부로서의 권한을 얻기 위해 예비적인 조치를 취한다.[각주:9]


   이와 같이 첫 번째 시오니스트 총회를 통하여 유대인 국가 건설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시작은 되었으나 정확히 어디에 정착할지에 대해서는 이때까지만 해도 명확하지 않았다. 이후 1차 세계대전을 지나면서 영국과 오스만 투르크의 전쟁을 통하여 시온주의 운동은 팔레스타인 지역으로의 귀환을 구체화 시키게 된다. 하임 바이츠만(Chaim Wezmann)은 영국 수상 제임스 아서 벨푸어(James Arthur Balfour)와의 협상을 통하여 ‘민족의 땅’으로서 팔레스타인 지역을 받게 될 것에 대한 협상을 이루었고 그렇게 ‘벨푸어 선언’이 공포 되었다. 


외무부

1917년 11월 2일

Rothschild에게

유대인 시온주의자들의 염원에 대한 탄원 그리고 그것에 대한 승인으로서 다음의 공감의 선언을 보냅니다. 

“정부는 팔레스타인 지역 내에 유대인들을 위한 국가적 거처(national home)을 설립하는 것에 호의적인 입장이며 이 목적을 이루는데 필요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지역 내에 있는 비유대인 공동체의 시민적, 종교적 권리에 편견을 주는 어떠한 시도도 하면 안 되며, 다른 나라에 있는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권리들과 정치적 위치에도 편견을 주는 어떠한 시도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백히 해야 합니다.”

당신이 이 선언을 시온주의자 연대에 대한 것이라고 이해하길 바랍니다. 

아더 제임스 벨푸어[각주:10]


   이후 영국은 소용돌이치는 팔레스타인 분쟁의 문제에서 자신들의 책임을 유엔에 넘기게 되었고 유엔은 1947년 11월 29일에 팔레스타인을 유대인 국가와 아랍 국가로 분할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유대인 인구수보다 인구가 두배나 더 많았던 아랍인은 오히려 더 작은 땅을 분할 받았다. 아랍진영은 결국 이  분할안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스라엘은 1948년 4월 15일 다비드 벤 구리온(David Ben Gurion)을 수상으로 하는 국가를 설립하게 된다. 한스큉은 이 당시 아랍이 유엔의 중재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국가로 서는 기회를 잃어버린 실수라고 지적하고 있다.[각주:11]



그림1) UN 분할국가 중재안[각주:12]


   플래판은 물론 이스라엘이 이 중재안을 받아들인 것은 향후 이스라엘 국가 영토 확장을 위한 발판이었지 궁극적인 합의점을 아니었을 것이라는데에 방점을 두고 있다.[각주:13]

   그러나 실제로 현재의 이스라엘의 국경은 1947년 UN의 중재안보다 더 넓은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독립국가로 선포된 이후 비유대인들을 불법체류자로 규정하고 수많은 핍박과 전쟁 속에서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이 갈등은 현재 진행형이다. 또한 단순히 팔레스타인 내 비유대인들과 유대인들만의 갈등이 아닌 주변 아랍국가들과 이스라엘의 대결구도로 번졌고 국가 간의 충돌로 이어지기도 했다. 시나이 전쟁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1956년 10월에 발발한 이 전쟁은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시나이 반도 점령을 끝이 났고 이후 소련과 미국의 중재로 다시 철수하게 되었다. 1967년에는 '6일전쟁’이 일어났다.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선제 공격함으로써 시나이반도, 가자지구를 재점령하였다. 1982년에는 레바논을 침공하기도 하였다.[각주:14]


Ⅲ. 시온주의는 유대교를 대변하고 있는가?


   이처럼 20세기 중반에 시작되어 20세기를 넘어오면서 제국주의와 세계대전의 힘의 논리를 배경으로 팔레스타인에 정착하게 되는 원동력을 제공한 시온주의 운동은 과연 유대교와 얼마만큼의 관계성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가령 유대교의 신앙의 가르침이 그대로 표출 된 것이 시온주의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니면 정반대로 이 운동은 종교역인 측면은 배제된 채 순전한 ‘유대인’중심의 또 다른 민족적이며 세속적인 정치운동으로만 볼 것인가?의 긴장관계 속에 놓여있다. 유대교가 강조하고 있는 교리적 측면에서 어떠한 부분이 시온주의와 맞닿아 있고 또 어떠한 부분이 종교를 넘어선 세속적 특징인지도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기본적으로 아브라함을 육적인 혹은 영적인 아버지와 그 계승적 관계로 해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아브라함을 바라보는 관점은 각각의 종교에서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기독교가 유대교의 아브라함 전통을 부인할 수 없다는 점과 이슬람 또한 아브라함에 대한 신앙과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다른 두 종교가 부인할 수 없다는 점을 한스큉은 지적하고 있다.

   유대교 공동체는 형성되는 공동체이다. 특정한 시점에서 갑자기 시작된 민족도 아니며 그 민족의 시작을 정확히 역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 한 가지 논점은 유대교가 마치 유대인을 인류의 시초 부족으로 보고 인류역사가 유대인, 이스라엘로부터 시작된 것처럼 묘사하는 것은 오류임을 한스큉은 지적하고 있다.[각주:15] 성서 초기에 나오는 아담 사상은 성서의 보편주의를 나타내는 중요한 단서임을 강조하고 있으며 바로 여기에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함께 대화할 수 있는 공통의 장소가 있음을 한스큉은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각주:16]

   성서에서 중요한 요소는 바로 출애굽, 시내산 언약 그리고 가나안 정착으로 이루어지는 이야기이다. 그 중 모세는 모든 종교에서 예언자적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인물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고 특별히 기독교에서는 모세의 위치가 예수 그리스도보다는 열등한 존재로 묘사되고 있지만 그 어떤 인물 보다도 자주 언급되는 인물이다. 요컨대 유대교는 하나님과의 언약으로 이루어진 계약 공동체이며 그와의 언약을 통해서 선택받은 백성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으로 이주하고 정착하게 되는 것이 유대교가 바라고는 성서의 중심주제일 것이다.[각주:17]

   한스큉은 성서를 근거로 한 구약의 이야기를 개괄적으로 서술한 이후 예수 시대 이후 유대교가 어떻게 점진적으로 변화하고 발전해왔는지 서술하고 있다. 그중 눈여겨 볼 점은 왜 유대교는 중세시대와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기독교의 변화와 같은 일종의 ‘종교개혁’이 일어나지 않고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점이다. 한스큉은 이에 대하여 포로기 이후 유대교는 성서보다도 바리새인과 랍비에 의해 주도되는 미쉬나와 탈무드 전통에 확고한 뿌리를 두고 있었으며 전 세계로 퍼진 다이스포라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전통과 율법을 해석해줄 수 있는 랍비의 권위가 매우 강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확고한 랍비-회당 패러다임을 통하여 헬라화되고 계몽화되었던 기독교와는 달리 유대교는 비교적 자신들의 전통을 온건하게 지켜올 수 있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물론 시대별로 다시 성서로 돌아가고자 하는 카라이파나 성서의 신비주의를 강조하는 카발라파와 같은 분파들이 생겨나기는 하였으나 십자군 전쟁이나 다른 시대적 상황 속에서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각주:18]

   이러한 랍비-회당 패러다임을 기반으로 한 종교배타주의로 인하여 유대교는 황제들 뿐만 아니라 계몽주의 시대에 들어 수많은 종교개혁가들에 의해 탄압을 받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하였다.[각주:19]

   근대사회에 들어오면서 유대교에 대한 정의는 더욱 어려워졌다. 국가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유대인보다 미국에 사는 유대인의 인구보다 10배가 더 많다. 또한 히브리어를 하지 못하는 유대인들도 상당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대전과 내전 등을 거치면서 종교 자체를 갖고 있지 않는 유대인들도 있다는 사실이다. 유대교를 고수하는 정통주의자들부터 종교자체에 무관심한 세속적 유대인들까지 다양한 계층이 있다. 시온주의 운동 초기의 사상가나 정치가들은 종교적인 이유에서보다는 국가와 민족의 개념으로서의 독립을 원한 측면이 더 크다. 예를 들어 헤르츨은 시온주의 운동의 태동에 크게 기여한 인물인데 그는 국가적 차원에서 종교적 정통주의가 강조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각주:20] 그는 시온주의 운동의 결과로 세워지는 국가 이스라엘이 신정체제를 갖게 되는 것에 대해 단호히 거부하는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건국 초기에는 이미 유대교 전통주의자들이 먼저 정착한 상황에서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상당했기 때문에 벤 구리온은 종교적 정통주의자들의 의견을 사회, 정치적 영역에 반양하기에 이르렀다. 결혼, 이혼 그리고 많은 삶의 영역에서 정통적인 유대교 양식이 초기 국가 이스라엘에서 나타나게 된 원인이었다.[각주:21]

   홀로코스트는 근대의 유대인들이 신앙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감을 갖게 하는 중요한 원인이었다. 리처드 루벤스타인(Richard Rubenstein)은 유대인수용소에서 신의 죽음이 최종적으로 증명되었다고 선언하면서 신의 존재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이는 단순한 사변적 논리가 아닌 경험적 허무에서 오는 정신적 충격이었다.[각주:22] 샬롬 벤코린(Shalom Ben-Chorin)은 아우슈비츠는 결국 기독교가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유대인들이 집단적으로 대신 고난 받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각주:23]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유럽의 국가들도 기독교 국가에서 세속사회로의 전이과정이 더욱 빨라졌던 것처럼 유대인들에게도 종교적 유대인보다는 초월적 신에 대한 회의감과 종교성을 넘어선 유대민족운동에 더욱 초점을 맞추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시온주의 운동은 전통적 유대교 신앙과의 거리감이 생겨나게 되었다. 

   또한 전 세계에 오랫동안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을 다시 하나로 묶을 수 있었던 것은 종교적인 흡인력 보다는 정치적, 국가적 보호의 필요성에 의한 것이다. 국가의 보호 아래에서 유대민족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줄 프리드만 또한 이스라엘 국가의 존재 아래 유대인이 의미를 갖게 됨을 강조하였다.[각주:24]

   요컨대 시온주의 운동은 신앙을 강조하는 전통적 유대주의와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인다. 수세기에 걸친 핍박과 종족말살 정책의 현실 속에서 기존의 신앙에 대한 회의감과 그러나 동시에 ‘시온’을 염원하는 민족적 정서가 결부되어 시온주의운동이라는 염원을 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힘과 정치력을 바탕으로 다른 말로 해석하면 또 다른 제국주의 세력으로서 이스라엘 국가가 설립되었고 지금도 그 힘의 균형점을 찾기 위해 지속적인 갈등이 야기되고 있는 것이다.  


Ⅳ. 시온주의의 평화모색 가능성 탐구


 1. 마틴 부버의 사상을 통한 공존의 가능성


   팔레스타인 지역 평화를 위한 접근법은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과거 정통주의 유대교에 근거한 유대인들의 강한 정체성을 유지하며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며 둘째로 근대적 패러다임 안에서 시온주의 운동과 같이 종교적인 측면 보다는 민족적 정체성을 강조하며 인종차별 정책을 지속하는 것이다. 셋째로 포스트 모더니즘적 접근으로 모두의 생존을 위한 실용주의와 현실주의적 입장을 수용하는 것이다.[각주:25]

   어떤 의미에서 유대교의 교리적 가르침보다 훨씬 더 배타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시온주의 운동은 팔레스타인 내 비유대인들과 또 다른 종교와의 타협과 평화를 위한 여지의 공간이 남아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먼저는 마틴 부버의 사상을 통하여 기본적으로 양진영이 가져야 할 마음과 태도에 대해 고민해보고 종교 간의 대화 차원에서 유대교와 기독교 특별히 유대교와 이슬람의 대화에서 공통의 기반을 두고 풀어나갈 이야기의 가능성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지금 실제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진행되고 있는 다양한 논의들과 활동들을 위에 살펴 본 배경에 비추어 평가해봄으로써 앞으로 시온주의 운동 더 나아가 팔레스타인 평화를 위한 미래적 활동에 대한 제언을 해보고자 한다. 

   마르틴 부버는 유럽 계몽주의의 근간을 세운 ‘관념철학’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철학의 시작은 ‘인식의 주체’가 아닌 ‘존재’의 관계성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즉 I-It이 아닌 I-Thou의 관계설정인 것이다. cogito(나는 생각한다)보다 relatio(관계)가 더 우선시 된다고 말한 것이다.[각주:26] 그는 1939년 취리히에서 열린 16차 시오니스트 총회에서 지금 유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민족 활성화나 히브리어 개선이 아닌 나-너의 관계 안에서 오는 ‘히브리적 휴머니즘’이라고 말했다. 사실 그 당시 그의 발언은 시온주의자들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개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관계중심, 타인을 생각하는 사상은 그 당시 많은 유대인들에게 사상적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부버의 사상은 결국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를 극복하게 할 수 있는 근본을 마련한 것이다. 또한 근대화와 전쟁의 황폐함 속에서 하나님을 지워가려는 대부분의 계몽주의 운동에 반대하며 부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의 대체 불가성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관계적 나-너의 구조 속에서 팔레스타인 내 유대인과 아랍인의 공존을 말하였다.[각주:27]

   부버도 주장하였던 것처럼 실제적으로 팔레스타인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양진영의 정치적인 타협점이 필요하다. 한스큉은 이에 대하여 몇 가지 조건을 제시하는데 첫째로 이스라엘 주변국가들이 이스라엘을 외교적으로 인정하고 그들의 경계선을 보장하는 것이며 둘째로 이스라엘은 시리아의 일부 영토 반환과 요르단의 요구에 귀를 기울여야 하며 셋째로 팔레스타인 민족이 주권국가로서 독립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각주:28] 이와 동시에 예루살렘은 두 진영이 함께 공존하는 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각주:29]

   한나 아렌트, 마그네스 등도 이민족주의 국가 설립을 지지했다. 유대인 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 지역 내 비유대인들 또한 소수 민족으로 살아가는 동일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특별히 아렌트는 민족주의 중심의 국가 건설이 결국 수많은 난민을 발생한다는 의미에서 시온주의 운동을 반대하였고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맞는 연방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다.[각주:30]


 2. 종교간의 대화를 통한 평화 추구


   종교간의 대화에 있어서 한스큉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의 공통 영역을 언급하면서 동시에 가까워질 수 없는 몇 가지의 영역을 언급하였다. 기독교의 교리의 출발을 삼위일체에 근간으로 한 신학으로 삼는 것은 유대교와의 대화에서 쉽게 단절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유일신 사상의 유대교 그리고 이슬람교에서 전능한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인간의 모습으로 내려와서 죽는다는 것이 그들의 신앙에 있어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창조주이며 영원한 인류의 구원자이자 심판자로서의 하나님의 개념은 모두가 합의 할 수 있는 부분인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침묵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주제에 대하여 몰트만과 같은 학자는 ‘고난 받는 하나님’의 개념을 도입하고 있으나 한스큉은 이 또한 하나님 자신이 고난을 당하는 주체가 되어서 죽는 모순적 상황이나 입증되지 않는 많은 고난 이론을 제시하는 것보다 실존적 상황 안에서 시간을 갖고 침묵하는 신학이 오히려 서로를 자극하지 않을 것이라고 조언한다.[각주:31]

   유대교와 기독교는 특별히 토라라는 공통된 기반과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두 종교 간의 이견이 있는 부분을 극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공통된 특징에 먼저 집중할 필요가 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철저한 유대인의 모습을 입고 온 사람이었다. 나사렛의 한 목수의 아들이 갑자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지칭 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스스로에게 메시야 자의식이 있었든 없었든 간에 상관없이 유대인들에게는 불경건한 것으로 비추어졌을 것이다. 이후의 메시야 선포는 별개로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은 철저히 유대적이었다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유대교 입장에서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할 여지가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와 유대교인은 시편이나 다른 문헌에서 공유할 수 있는 전통이 있으며 무슬림의 경전이 꾸란의 몇몇 기도문 신학적으로 문제 없이 세 진영이 함께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 한스큉의 주장이다.[각주:32] 이러한 기도에 대한 서로의 이해가 확인 된다면 바위 돔 사원을 사용하는데에 있어서도 무슬림과 기독교인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도 기도를 위한 장소를 쓸 수 있는 평화의 장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슬림 중에도 다양한 관점이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대중매체를 통한 호전적인 이슬람주의자들의 주장 외에 온건한 이슬람 진영은 평화적인 접근과 이슬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반유대주의'에 도전하고 있다. 스코틀랜드에 있는 이슬람 대학에서는 'Islamicjerusalem'이라는 단어를 만들었다. 이슬람 성구와 전통에 근거하면 예루살렘은 평화와 갈등 해소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약과 꾸란의 올바른 대화를 통해서 서로의 공통된 주장을 확인하면서 갈등을 풀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각주:33]


 3. 평화에 대한 기독교적 입장


   이스라엘의 귀환 운동을 주장하는 소위 '알리야 운동'에서는 20세기 초 이스라엘의 건국을 이미 성경에 예언된 이스라엘을 향한 회복의 말씀으로 그 근간을 삼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종말의 시대에 구약 예언의 성취의 주인공은 이스라엘의 혈통적인 후손들, 곧 다윗 왕으로 시작된 유다 왕국의 후손들이라고 주장하는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의 세대주의와도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까지 이슈가 되었던 '백투예루살렘' 운동이 있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문자 그대로 회복될 것인데 예루살렘도 지금의 지정학적 위치에서 재림이 이뤄지므로 예루살렘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이필찬은 이스라엘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존재가 아니라 그 뒤로는 에덴의 아담을 배경으로 하고 신약에서는 교회에서 그 종말적 성취를 보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위의 주장들은 성경적 입장과는 거리가 멀다고 비판하고 있다.[각주:34]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자신의 책, 『하나님의 선교』에서 야웨는 이스라엘만을 위해 존재하는 편협한 지역신이 아닌 다른 어떤 인간이 만들어 놓은 신들과 비교할 수 없는 전 우주적인 하나님이라는 매우 중요한 발상의 전환을 가져왔다. 이러한 야웨에 대한 이해는 선교의 성경적 기초가 아닌 성경의 선교적 기초라는 해석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단초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매우 자주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 사이에서 큰 단절을 느꼈기 때문이다. 구약의 하나님을 이스라엘만을 위한 하나님으로 이해하고 신약의 하나님을 온 열방의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이분법적 사고에서는 성경을 통전적으로 해석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라이트는 이 부분에 대하여 구약의 하나님이 단순히 이스라엘에만 묶여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온 민족의 하나님이라는 관점으로 풀어감으로써 신약의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모습과 충돌되지 않는 것이다.[각주:35]

   자칫 선민주의에 빠질 수 있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으로 다가가시며 때로는 언약의 백성에게 심판을 내리시기도 하며 또한 예언자들을 통하여 자기 백성을 벌하시겠다고 말씀하시기도 한다. 또한 바벨론의 포로시기를 통하여서도 하나님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니라 느부갓네살의 하나님, 고레스의 하나님도 되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라이트의 아모스 9장 7절의 말씀 해석은 탁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오랫동안 아모스의 중심주제인 이스라엘의 타락에 대한 경고의 말씀과 9장 7절의 말씀과의 불일치 속에서 혼란스러운 점이 있었으나 라이트의 ‘이스라엘만을 편애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본문의 해석이 자연스러워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동일한 관점으로 그의 다른 책에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에 대한 난제를 풀어갈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기도 하다.[각주:36]

   이것은 비단 국가 이스라엘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특권의식과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한국 교회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은 그 어떤 다른 신들과도 비교할 수 없는 모든 민족 위에 신이라는 사실이다. 만약 이러한 야웨의 보편성과 유일성에 도전을 받는다면 그 도전의 주체가 설령 언약 백성이라고 할지라도 다른 민족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여 심판하시고 원래의 약속으로 돌이키신다는 사실이다. 한국 교회의 모습이 혹 바벨론 포로기 이전 하나님과 원수 되려 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이 있지는 않는지 깊은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한스큉은 기독교인으로서 이스라엘 국가와의 관계는 비판적 연대를 형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즉 첫째로 이스라엘을 국가적으로나 외교적으로 인정하되 팔레스타인 내에서 그들의 땅의 소유권을 정당화하는 신학을 발전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다. 둘째로 성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상징성이나 홀로코스트 사건 이후의 동정심만으로 이스라엘 국가의 정치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보다는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가 함께 공존할 수 있는 대화의 장을 열어주며 위에서 언급한 종교 간의 대화를 열린 자세를 갖고 임할 수 있도록 중재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각주:37]

   이러한 팔레스타인 지역 내 기독교의 역할에 대하여 최근에 ‘카이로스 팔레스타인’운동이 전개되고 있다.[각주:38] 팔레스타인 내 거주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기독교인들이 팔레스타인 평화를 위해서 해야 할 사명과 그 당위성을 설명하는 문서를 발표한 것이다.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계획 속에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가 공존하게 하셨으므로 이들의 권리를 빼앗고 박탈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부정의한 것이므로 저항해야 한다는 것이다. WCC 또한 비슷한 맥락에서 2014년, WCC Central Committee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판에 대한 경제지표와 기독교의 책임’(Statement on Economic Measures and Christian Responsibility toward Israel and Palestine)[각주:39]을 발표하였다. 특별히 미국 장로교회와 연합감리교회의 예를 들면서 이스라엘의 불법적 지역 점령을 지지하는 기업들의 제품을 불매하는 운동을 벌이는 것을 언급하고 있기도 하다. 이처럼 적극적인 행동을 통하여 약자들을 보호하는 적극적인 형태의 운동도 전개할 것을 말하고 있다. 

   이윤희는 팔레스타인 분쟁에 대하여 한국교회가 구체적으로 도울 수 있는 몇 가지 사항을 제안하고 있다.[각주:40] 첫째로는 평화의 관점에서 성경을 다시 읽고 공부하는 모임이다. 둘째로 불매운동(Boycott), 투자 철회(Divestment),제재(Sanction)운동에 참여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셋째로 기존의 성진순례는 이스라엘 국가의 논리를 더욱 강화하는 것이므로 대안적 성지순례를 진행할 것을 권면하고 있기도 하다. 


Ⅴ. 결론


   시온주의 운동은 유대교 정통주의와는 사뭇 다르게 유대인의 민족성을 사회적이며 세속적으로 강조한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시온주의 운동의 결과로 이스라엘 국가가 건립되는데 있어서 다양한 정치적 긴장과 특별히 다른 나라들의 개입으로 인한 역학관계가 존재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힘에 의한 이주정책으로 인하여 팔레스타인 지역에 기존에 살고 있는 수많은 비유대인들과의 갈등이 생겨났고 이 갈등 양상은 더욱 커저 가다가 결국 아랍국가들과 이스라엘의 전쟁으로 번져가기도 했으며 그 후유증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시온주의 운동에 있어서 타민족과의 평화 공존을 위한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가의 질문을 던지게 된다. 유대인으로서 관념철학을 넘어 상대방을 인식하고 배려하는 ‘나와 너’의 관계성을 강조한 마틴 부버의 사상은 많은 유대인들에게 영향력을 끼쳤고 두 민족이 함께 공존하는 현실적 타협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유대교 뿐만 아니라 기독교, 이슬람교 심지어 종교를 갖고 있지 않는 무신론적 유대인들과 상당수 존재하고 있다. 특별히 이 세 종교는 동일한 뿌리에서 시작되었고 공통분모를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첨예한 서로의 입장 차이를 강조할 것이 아니라 창조주이며, 구원자이며, 심판자이신 한분 하나님의 신앙 아래에서 서로를 배려하고 이해하며 대화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기독교적 입장에서 국가 이스라엘을 성서의 이스라엘과 동일시하지 않고 연약한 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부정의한 일을 시도하는 것에 대해서 저항하며 평화공존의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비판적 자세를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할 것이다. 이처럼 정통주의와 전근대적인 민족주의를 넘어서 상대와의 관계를 중시하고 함께 공존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을 찾는 것이 시온주의 운동이 앞으로 추구해야 할 방향일 것이다.



*참고도서


1. 번역도서

Bulter, Judith. 양효실 역. 『지상에서 함께 산다는 것』. 서울: 시대의 창, 2016.

Chapman, Colin. "Evangelicals Islam and the Israeli-Palestinian Conflict." 김아영 편. 『이슬람연구2』. 서울: 예영커뮤니케이션, 2013.

Küng, Hans. Das Judentum: Die religiöse Situation der Zeit. 이신건 외 2인 역. 『한스큉의 유대교』. 서울: 시와진실, 2015.

Mitho, Miyata. 박은영•양현혜 역. 『홀로코스트 이후를 살다』. 서울: 한울, 2013.

Sartre, Jean-Paul. 오정환 역. 『아랍과 이스라엘』. 서울: 시공사, 1991.

Wright, Christopher. The God I Don't Understand. 전성민 역. 『성경의 핵심 난제들에 답하다』.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3.

__________________. The Mission of God. 정옥배 역. 『하나님의 선교』. 서울: IVP, 2013.


2. 서양도서

Ateek, Naim Stifan. A Palestinian Christian Cry for Reconciliation. N.Y.: Orbis Books, 2008.

Flapan, Simma. The Birth of Israel: Myths and Realities. N.Y.: Pantheon Books, 1987.

Harnack, Adolf. The Mission and Expansion of Christianity in the First Three Centuries. PA: Harper Torch Books, 1962.

Pinsker, I. "Autoemanzipatio!." Ein Mahnruf an seine Stammesgenossen von einem russischen Juden. Brlin 1882.


3. 국내도서

이윤희.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적 공존을 위한 기독교의 역할.”기독교사상(2014.09), 

25-41.

이필찬. 『이스라엘과 교회: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4.


4. 기타자료

http://www.kairospalestine.ps/index.php/about-us/kairos-palestine-document [2017.12.23. 접속]

https://www.oikoumene.org/en/resources/documents/central-committee/geneva-2014/statement-on-economic-measures-and-christian-responsibility-toward-israel-and-palestine [2017.12.23. 접속]


  1. 최근 미 대통령 도날들 트럼트의 ‘예루살렘 수도 선언’ 발언은 유대인과 비유대인들의 갈등을 증폭시키는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본문으로]
  2. Hans Küng, Das Judentum: Die religiöse Situation der Zeit, 이신건 외 2인 역, 『한스큉의 유대교』(서울: 시와진실, 2015), 272-277. [본문으로]
  3. Adolf Harnack, The Mission and Expansion of Christianity in the First Three Centuries (PA: Harper Torch Books, 1962), 1-35. [본문으로]
  4. Hans Küng, 338. [본문으로]
  5. Hans Küng, 412. [본문으로]
  6. Hans Küng, 413-414. [본문으로]
  7. Hans Küng, 414-415. [본문으로]
  8. I. Pinsker, "Autoemanzipatio!". Ein Mahnruf an seine Stammesgenossen von einem russischen Juden, Brlin 1882, 35.을 Hans Küng, 416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9. 장 폴 샤르트르, 오정환 역, 『아랍과 이스라엘』(서울: 시공사, 1991), 102. [본문으로]
  10. Naim Stifan Ateek, A Palestinian Christian Cry for Reconciliation(N.Y.: Orbis Books, 2008), 191.의 원문을 번역하여 옮겼음. [본문으로]
  11. Hans Küng, 433-434. [본문으로]
  12. Simma Flapan, The Birth of Israel: Myths and Realities(N.Y.: Pantheon Books, 1987), 29. [본문으로]
  13. Simma Flapan, 31. [본문으로]
  14. Hans Küng, 443-444. [본문으로]
  15. Hans Küng, 29-51. [본문으로]
  16. Hans Küng, 52-75. [본문으로]
  17. Hans Küng, 76-103. [본문으로]
  18. Hans Küng, 104-262. [본문으로]
  19. Hans Küng, 263-272. [본문으로]
  20. Hans Küng, 420. [본문으로]
  21. Hans Küng, 761. [본문으로]
  22. 미야타 미쓰오, 『홀로코스트 이후를 살다』(서울: 한울, 2013), 44. [본문으로]
  23. 미야타 미쓰오, 45. [본문으로]
  24. 장 폴 샤르트르, 오정환 역, 『아랍과 이스라엘』(서울: 시공사, 1991), 340-341.. [본문으로]
  25. Hans Küng, 799. [본문으로]
  26. Hans Küng, 650. [본문으로]
  27. Hans Küng, 651-656. [본문으로]
  28. Hans Küng, 808. [본문으로]
  29. Naim Stifan Ateek, A Palestinian Christian Cry for Reconciliation, 176. [본문으로]
  30. 주디스 버틀러, 양효실 역, 『지상에서 함께 산다는 것』(서울: 시대의 창, 2016), 228-229. [본문으로]
  31. Hans Küng, 859-876. [본문으로]
  32. Hans Küng, 840. [본문으로]
  33. Colin Chapman, "Evangelicals Islam and the Israeli-Palestinian Conflict", 김아영 편, 『이슬람 연구2』(서울: 예영커뮤니케이션, 2013), 91-109. [본문으로]
  34. 이필찬, 『이스라엘과 교회: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4), 438-439. [본문으로]
  35. Christopher Wright, The Mission of God, 정옥배 역, 『하나님의 선교』 (서울: IVP, 2013), 93-130. [본문으로]
  36. Christopher Wright, The God I Don't Understand, 전성민 역, 『성경의 핵심 난제들에 답하다』(서울: 새물결플러스, 2013), 147. [본문으로]
  37. Hans Küng, 814-819. [본문으로]
  38. http://www.kairospalestine.ps/index.php/about-us/kairos-palestine-document [2017.12.23. 접속] [본문으로]
  39. https://www.oikoumene.org/en/resources/documents/central-committee/geneva-2014/statement-on-economic-measures-and-christian-responsibility-toward-israel-and-palestine [2017.12.23. 접속] [본문으로]
  40. 이윤희,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적 공존을 위한 기독교의 역할,” 기독교사상(2014.09), 25-41. [본문으로]
Posted by joshua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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