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기독교를 만나다
-수원성교회 선교회보 기고글

황인성 목사(바른교회아카데미)

들어가며
올해는 루터가 독일에서 종교개혁을 일으킨지 50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 당시 로마카톨릭 교회의 교황숭배사상과 성전건축을 위한 무리한 헌금 강요 그리고 사제들에게만 국한된 성찬권과 성경 번역 금지 등에 대항하여 루터는 95개의 반박문을 써서 종교개혁의 불씨를 당겼고 이후 그의 영향을 받은 츠빙글리, 칼뱅, 존 녹스와 같은 종교개혁가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렇듯 개혁의 정신으로 시작된 유럽의 개신교(통상 기독교는 천주교와 개신교를 포함하는 용어로 본다면 개신교로 구분하여 부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는 500여년이 지난 지금 어떤 상황에 놓이게 되었을까요?

유럽의 상황
안타깝게도 유럽 교회의 현실은 일단 눈에 보이는 수치로 보았을 때 분명한 쇠락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1800-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기독교 국가’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었으나 지금은 유럽 국가들 내에서 정기적으로 교회에 나오는 기독교인의 비율은 10%내외 이거나 그 이하인 경우가 많습니다(프랑스의 경우 물론 카톨릭 국가이기는 하지만 개신교 비율은 1%가 채 되지 않습니다)

쇠퇴의 이유
지난 100여년 동안 그리고 지금까지도 수많은 학자들이 왜 개신교가 시작되었던 유럽의 교회들이 쇠퇴하고 있는가를 연구해 오고 있습니다. 그 원인은 다양하고 또한 수많은 민족들과 각자만의 깊은 역사를 가진 유럽 나라 각각의 특수한 상황과 이유가 있겠으나 두 가지 큰 주요 원인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18세기부터 이미 시작된 유럽의 가치관의 근본적인 변화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20세기초반 서구 문명이 유입 되면서 우리 전통에 대한 고민과 때로는 단절을 경험 하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사회 전반적으로 유교적인 문화와 불교적인 문화, 때로는 민속 신앙의 요소가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의미가 약화된 것입니다. 유럽 사람들에게도 근대사회 더 나아가 현대사회로 넘어가기 위해 극복해야할 과거의 봉건성이 있는데 이 대부분이 교회와 관계된 것들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제식민지배에 대항하고 나라가 부강할 수 있는 한 방법으로 기독교 받아들이는 신 문물인 것에 반해 유럽인들에게 기독교는 극복의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세속화 과정’으로 설명하려고 했고 어떤 이들은 이 현상을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기독교 국가’에서 세속화 된 근대 사회로 넘어오는데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두번째 이유인 전쟁의 경험입니다. 20세기로 넘어오면서 유럽사회는 1차 2차 세계대전의 직접적인 전쟁터로 변하게 됩니다. 종교개혁의 중심지였던 독일과 그 개혁 신앙이 이제는 히틀러의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신학이 되었습니다. 기독교 국가들끼리 서로의 이해관계를 위해 이웃 형제 자매들을 죽인 것 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유럽인들의 마음 속에 더 이상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닌 ‘이기적인 하나님’ 혹은 사람들의 고통에 위로하거나 답을 주지 않는 ‘숨어있는 하나님’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필요한 사역들
바로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유럽사회 전반에 퍼져있고 그것에 대해서 지난 반세기 동안 급변하는 산업화, 자유경제주의의 발전, 수 많은 내전들이 각 나라의 특수적 상황과 맞물려 교회가 현재 처한 다양한 상황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유럽의 교회들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을까요? 첫째는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의 급격한 감소입니다. 물론 여전히 태어나서 유아 세례를 받고, 결혼을 교회에서 하고 죽으면 교회에서 장례를 치르는 기독교 문화는 유지되고 있으나 실제로 일상에서 교회에 나와 예배하거나, 주일 성수, 성경공부, 교회를 통한 사회봉사는 매우 약화된 상황입니다. 한 예로 몇 년 전 덴마크의 한 루터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약 300-400명은 들어갈 수 있는 큰 예배당이었는데 20-30여명의 사람들만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은 유아 세례가 있었던 날이었습니다. 예배가 진행되면서 가만히 살펴보니 현지인들이 마치 찬송가를 처음 부르는 것처럼 노래를 낯설어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날 예배에 참석한 대부분의 사람은 아이의 유아세례를 축하하러 온 가족들이었고 평소에는 교회에 오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날 그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한 교인은 코에 콧 줄을 끼고 휠체어에 의지한 할머니 한 분이셨습니다.
우리나라의 ‘가나안 성도’(기독교인이지만 교회에 ‘안나가’는 성도)와 마찬가지로 유럽은 이미 본인은 기독교인이라고 말하지만 정기적인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이 많습니다. 어떻게 이들이 다시 공동체에 나와서 관계를 통한 정기적인 신앙생활을 회복하고 유지 할지에 대한 도전이 남아있습니다.
둘째로 사역자의 감소입니다. 유럽 대부분의 신학교들은 학생수가 감소했을 뿐 아니라 어떤 신학교들은 문을 닫기도 했습니다(현재 장신대도 지방의 경우 미달인 경우가 생겨나고 있고 서울의 경우도 매해 12명씩 인원을 감축하고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교회에서 활동하는 사역자들의 숫자가 감소했습니다. 한 명의 목사가 4-5개의 교회를 돌보는 일이 다반사가 되었습니다. 목사가 없는 교회는 평신도들이 돌아가면서 설교를 하기도 합니다. 설사 목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목회자들은 교회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 지역의 세례, 결혼, 장례를 홀로 다 감당해야 하므로 성도들의 신앙교육이나 깊은 교제를 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셋째 외부적으로는 이주민들의 증가를 들 수 있습니다. 과거 식민주의와 냉전시대의 부작용으로 새롭게 독립한 아프리카 신생국가들과 중동의 정권 교체는 안타까운 내전과 종족갈등으로 비화되는 경우가 생겨났습니다. 그들은 정치적, 종교적 이유로 인해 인근의 유럽으로 피난을 오게 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규모가 커져가고 있고 이는 유럽사회 전체의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올해에만 벌써 지중해를 넘어오다 익사한 피난민들이 1000명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과거 로마제국 멸망의 한 원인을 동쪽 훈족의 침입을 피해 중앙유럽으로 게르만족이 대거 이주한 것을 꼽고 있습니다. 지금 유럽은 이와 비슷한 위기감과 내홍을 겪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교회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해외선교가 아닌 자신의 교회들을 다시 세우고 또한 이민자 유입 상황에 대한 기독교적 대응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희망과 도전
한국의 기독교는 지난 130여년간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교회가 처음 세워지기 시작할 때부터 제주도와 산둥 반도를 비롯한 해외 선교가 동시에 일어난 매우 선교 지항적인 교회적 특징이 있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한 형제요 자매인 유럽의 교회들에 대한 사랑의 책임이 있습니다. 유럽의 기독교 숫자가 줄었으므로 한국 교회가 목회자들을 많이 보내고 재정을 지원하면 된다는 일차원적인 해법은 효력이 없습니다. 먼저는 서로의 기독교에 대한 깊은 이해와 관계설정이 우선입니다. 한국 교회는 외형적 크기의 성장을 자만하지 말고 겸손하게 유럽 교회의 역사를 배우고 또 현재의 복잡한 상황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물론 모든 선교지가 장기적으로 관계를 형성해가야 하지만 특별히 유렵 지역은 타 지역 선교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유럽 교회들 또한 자신들 스스로가 기독교의 종주국이라는 교만을 내려놓고 현재 비 서구권 국가들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다양한 교회 활동들을 연구하고 자신이 속한 교회에 적용하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몇 주 전 안광수 목사님과 몇몇 목사님들과 함께 독일 루터 현지 교회를 방문하고 왔습니다. 몇 년 전 한국을 방문해서 한국의 건강한 교회들을 연구한 독일 목회자들이 이번에는 반대로 한국 목회자들을 초청한 것입니다. 독일의 교회들은 나라에서 세금을 걷어 총회를 통해 교역자들에게 사례를 주는 구조여서 중앙 집권적이고 총회 중심의 일이 많습니다. 어떤 사역을 하는데 있어서 일관적이고 집중적인 효과를 볼 수 있으나 지역의 각 교회가 유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사역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약하게 됩니다. 이번 방문에서 흥미롭게 느꼈던 점은 한국을 방문했던 한 독일 목사님이 자신의 지역교회에서 한국에서 보고 연구했던 실제적인 사역을 적용하여 사역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작지만 그리고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서로의 신뢰를 바탕으로 상호 배움을 통해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는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마치며
현재 유럽 기독교의 상황을 단순히 숫자로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통계가 보여주는 숫자 이면에는 기독교와 관계된 깊은 역사적 배경이 있고 다양한 민족들이 얽힌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유럽 선교를 위하여 먼저 우리는 유럽의 기독교에 대한 정확하고 깊은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며 현재 급변하고 있는 다양한 상황들, 특별히 난민들과 민족 갈등에 대한 소식들을 지켜보며 함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겸손한 마음으로 유럽교회들과 연합 사역을 통한 상호 배움을 통하여 각자의 교회에 필요한 은사들을 나누는 노력이 필요할 때 입니다.

Posted by joshua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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